“내 판타지 작품 중에 슈퍼히어로를 다룬 것은 한 편도 없다. 마법사가 등장하더라도 그들 역시 보통 사람처럼 실수를 하고 고난을 겪는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내 판타지 작품이 가능한 한 현실적이길 바란다. 현실 그 자체가 이미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 어슐러 K. 르 귄 방탄소년단 <YOU NEVER WALK ALONE>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거침이 없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 5월 22일 빌보드 뮤직 어워드의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에서 저스틴 비버, 셀레나 고메즈, 아리아나 그란데 등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K팝 그룹 최초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죠! 미국을 비롯한 97개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의 1위를 석권하고, 빌보드와 오리콘 등 해외 음악차트를 휩쓰는 등…. 그야말로 글로벌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윙스WINGS>의 외전 <YOU NEVER WALK ALONE> 앨범, 그중에서도 타이틀곡 <봄날> 또한 굉장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난 2월 발표된 <봄날>은 국내 주요 음원사이트와 해외 여러 나라들의 아이튠즈 송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미국 빌보드 ‘버블링 언더 핫 100’ 15위에 랭크되는 등 국적을 가리지 않는 주목을 받았습니다. <봄날>의 뮤직비디오는 지금 유튜브에서 9,200만에 육박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봄날> MV,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 오늘 저희 출판사는 <봄날>에 관하여 조금 다른 얘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해 이들의 <WINGS> 앨범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헤르만 헤세의 고전 <데미안>에서 가져와 출판계에서도 크게 주목했던 바 있죠. 이들의 문학적 영감은 단순한 일회성이 아니었나 봅니다. 방탄소년단은 <봄날> 뮤직비디오를 통해, 놀라울 만큼 훌륭하고 품격 있는 은유적 메시지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죠? 이미 <봄날> 뮤직비디오를 보고 수많은 BTS 팬분들께서 말씀해 주셨듯, <봄날>은 뮤직비디오 콘셉트는 어슐러 K. 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 속 단편 작품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통해 방탄소년단이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 또한 이 소설과 정확히 상응한답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1973년 SF 및 판타지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휴고상 단편부문 수상작으로, 그리 길지 않지만 르 귄 특유의 강렬하고 선명한 문체와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 걸작입니다. 어슐러 K. 르 귄은 『반지의 제왕』의 J. R. R. 톨킨과 『나니아 연대기』의 C. S. 루이스와 함께 판타지 문학을 대표하는 3인방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문학상을 휩쓸었던 ‘살아있는 전설’인데요. 그녀의 위상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리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SF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단연 1순위의 작가일 것,” 그럼, 작품의 스토리와 함께 <봄날> 뮤직비디오의 장면을 간단히 짚어 볼까요? 1. 온통 겨울뿐인 고독한 시간 “요란한 종소리에 제비들이 높이 날아오르면서, 바닷가에 눈부시게 우뚝 선 도시 오멜라스의 여름 축제는 시작되었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삭구에는 깃발이 나부꼈다.”― 『바람의 열두 방향』,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455페이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서두입니다. 오멜라스는 먼 과거의(또는 먼 미래의) 어느 가상의 공간입니다. 왕도 없고, 전쟁도 없고, 노예도 없고, 죄인도 없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에 가까운 공간이에요. 웃음과 종소리, 행진과 잔치와 경주마 등등으로 가득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여 행복한 시절을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방탄소년단의 <봄날> 뮤직비디오는 다르게 시작됩니다. 멤버들은 일영(日迎)이라는 ―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의 ― 가상의 기차역과, 눈이 쌓인 한겨울의 철길 위에,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닷가에, 수많은 ‘친구’들의 주인 없는 짐들을 실은 채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 안에 제각기 떨어져 있습니다. 정국은 “YOU NEVER WALK ALONE”이라고 적힌 퇴락한 놀이기구 앞에서 쓸쓸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혼자입니다. 그런데 랩몬스터가 텅 빈 기차칸을 통과하여 ‘오멜라스’라는 건물 앞에서 서성이는 슈가와 제이홉을 마주합니다. 랩몬스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요. 여기서 ‘오멜라스’가 처음 등장합니다. 작가 어슐러 K. 르 귄은 오멜라스라는 용어에 대하여 이 작품의 후기에서 ‘옴 엘라스’, 프랑스어로 “아아, 인간이여”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적어두고 있습니다. 소설과 뮤직비디오의 세계가 ‘인간의 무대’에서 만났습니다. NO VACANCY, 빈 방이 없다는 네온이 반짝이고 있는 것도 보이시나요? 그리고 랩몬스터의 시각을 따라, 회상의 느낌에 가까운 장면들이 깔립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군요. 그들은 케이크를 던지고 방 안을 어지럽히며 난동을 피워 댑니다. 그리곤 케이크에 폭죽을 꽂아 놓고 자신들의 시절을 즐깁니다. 하지만 무언가 어긋나고, 흐트러진 모습입니다. 폭죽을 바라보는 그들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둡고 씁쓸한 정서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2. 오멜라스, ‘가짜 행복’이 지배하는 사회 눈이 내리는 겨울밤, 랩몬스터는 제이홉, 슈가와 함께 다시 오멜라스 앞에 섰습니다. 그들이 있을 곳은 거짓 행복으로 가득한 오멜라스 안이 아닙니다. 오멜라스의 행복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느냐고요? 어슐러 K.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함께 읽어봅시다. 작가는 아름다운 공공건물들의 지하실 방. 그 지저분하고, 축축하고, 자신의 배설물들이 쌓여 있는 공간에 갇혀서 공포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느 열 살쯤 되는 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다음 묘사가 더 충격적입니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 『바람의 열두 방향』,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464페이지 누군가 아주 연약한 존재가 죄도 없이 비참한 삶에 시달림으로써 유지되는 마을의 행복! 그 존재를 적당히 외면하면서, 아니, 조금은 미안해하면서, 그래도 이런저런 합리화를 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 ‘다 그런 거지, 어쩔 수 없지 뭐’라면서 그 아이들을 애써 잊어버리려는 현대 사회의 잔인함을 어슐러 K. 르 귄은 으스스할 만큼 서늘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잊힌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세월호 참사를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2014년 봄날에 죽어간 304명의 생명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부분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아이들과 꼭 같이 10대의 꽃다운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은 국민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우리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비극을 외면하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월호’라는 상징은 (어슐러 K. 르 귄의 묘사처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들의 눈앞의 행복과 안위만 쫓다가 내던져 버린 인간 존엄의 상징입니다. 오멜라스의 세계관으로 말하자면,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이었습니다. 3. 오멜라스를 떠나는 방탄소년단 그리고, 방탄소년단은 <봄날>의 가사를 통해 “너무 야속한 시간, 나는 우리가 밉다”고 노래합니다. 떠난 너를 지우겠다는 말을 그만두고 “조금만 기다리면, 며칠 밤만 더 새우면, 만나러 갈게, 데리러 갈게”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행동을 하려는 걸까요? 바닷가에서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온 지민. 그와 멤버들은 오멜라스 안의 세탁실로 들어갑니다. (지민 옆에 놓인 신발, 보이시죠?) 바로 이 세탁실의 장면이야말로 뮤직비디오의 훌륭한 압권입니다. (시계가 9시 35분에 멈춰 있는 장면은 다시 한 번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방탄소년단은 오멜라스의 가짜 행복, 즉 케이크와 폭죽 대신에, 수많은 희생자들의 옷가지들을 직접 빨아주기로 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쌓여서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던 더러운 옷들을 모두 씻어냅니다. 어두컴컴한 옷가지 속에 들어오는 한 줄기 빛. 그 안에서 노래하고 있는 슈가―.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봄날’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가짜 행복이 지배하는 오멜라스를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봄날’을 상징하는 ‘빛’이 그들 곁으로 돌아옵니다. 누구도 찾지 않던 놀이기구에 노란 리본들이 걸리는 동시에 전등이 들어왔고, 기차 위에 앉아있는 제이홉은 먼동이 아름답게 트는 순간, 하늘을 향하여 종이비행기를 날립니다. 정국이 오멜라스의 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따뜻한 색감의 빛들이 가득한 오멜라스의 세탁실을 지나서, 정국과 멤버들은 모두 합류합니다. 이제 방황은 끝났습니다. 8월에도 겨울이 오는 그 끝없는 추위와 어둠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오멜라스 밖은 ‘그 누구의 아픔도 잊지 않는 공간’이며, 그들의 봄날이란 ‘누군가의 슬픔을 잊지 않는 시간’입니다. 4. 봄날의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다시 함께 모인 그들은 철없이 폭죽을 터뜨리며 시끄럽게 놀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둘러앉아 촛불 하나를 켤 뿐입니다. 수많은 옷가지들은 이젠 더 이상 깊고 축축한 어둠 속에 있지 않네요. 멤버들 모두와 함께 푸르디푸른 하늘 높은 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멤버들은 이제 저마다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기차를 함께 타고, 따스한 태양 속에서 겨울에 내렸던 눈이 점차 녹고 있는 들판 밖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설국열차의 엔딩을 연상케 하는 이 시퀀스에서 일곱 멤버는 서로를 서로에게 의지하며,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 곧고 강인한 나무를 바라봅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세계 전반에서도 나무는 아주 신성한 생명으로 그려지고 있답니다.) 한겨울의 황량함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벌거벗은 나무― 지민은 바닷가에서 가져온 신발을 그 나무 위에 걸어 줍니다. 말할 것도 없이, 신발에 깃들어 있는 죄 없는 영혼을 추모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벚꽃 잎이 휘날리는 봄날의 푸른 하늘과 나무를 멀리 카메라에 담으면서 뮤직비디오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어떻게 끝나고 있을까요? 여러분께 작품을 읽는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하여, 결말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결말이 <봄날> 뮤직비디오의 엔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어슐러 K. 르 귄은 <봄날>보단 조금 더 여운을 남기고, 조금 더 고독한 해결책을 암시했지요. 더불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뒤의 단편 「혁명 전날」에 대해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가 스스로 후기에서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에겐 일곱 멤버가 함께 봄날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봄날>의 뮤직비디오에서도 그런 다짐이 잘 드러나 있지요. 그들에게 있어 ‘YOU NEVER WALK ALONE’이란 문장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멤버들 서로가 서로에게 던지는 격려의 말이기도 할 테니까요. <YOU NEVER WALK ALONE> 앨범의 마지막 곡, ‘A Supplementary Story: You Never Walk Alone’의 한 구절처럼 말이죠. “넌 같이 걸어줘 나와 같이 날아줘 하늘 끝까지 손닿을 수 있도록 이렇게 아파도 너와 나 함께라면 웃을 수 있으니까” 5. 마무리하며어슐러 K. 르 귄은 1970년대 초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쓴 배경에 대하여 “미국인이 처한 양심적 딜레마”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대중 산업사회가 고도화되며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 그리고 유례없이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미국인들이 소외된 이웃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나 부채감도 없이 미국 사회를 찬양하는 분위기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리고 그 메시지에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이 작품 말고도 『바람의 열두 방향』에는 작가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짐작게 하는 초기 걸작들이 수두룩합니다. 60년대에서 70년대, 작가가 아직 SF/판타지계의 거장이 되기 전에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성장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그런 면에서 어슐러 K. 르 귄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입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왼손』이나 어스시 전집 등 그의 대표작들을 천천히 읽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방탄소년단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미 세계의 최정상에 서 있지만, 그들 또한 더욱더 높고 아름다운 어딘가를 향하여 계속 나아가리라 확신합니다. <봄날>은 어쩌면 그들에게 중요한 도약이 아닐까 기대해 봅니다. 맨 처음 인용한 어슐러 K. 르 귄의 말처럼, 우리 세계에 필요한 것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니까요. 함께 아파할 줄 알고, 때로는 실수하면서도, 누군가의 슬픔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존재야말로 가장 강한 영웅입니다. 방탄소년단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지 출처: 방탄소년단 <봄날> MV